<2014년, 캄보디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겨우내 땅속에서 꿈꾸며 잠들어 있던 온갖 생명들이 뾰족뾰족 얼굴을 내밀며 내게 봄 인사를 건넨다. 원추리, 수선화, 히야신스들이다. 봄은 이들의 꿈이 펼쳐지는 무대이다. 십 수 년 전 이곳 양평에 이사와 나는 제일 먼저 잠에서 깨어나는 이들과 가슴 설레는 만남을 가진다. 물론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꽤 오래전 현실과 치열한 전쟁을 치루며 빡빡하게 살아내던 이십대, 그 때부터 움텄던 나의 꿈이 수십 년을 견디며 기다려 얻은 열매이다. 이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많은 가지치기를 해야 했다. 날로 달로 새롭게 유혹하는 럭셔리한 도시생활을 단호히 포기하고 시골로 내려왔다. 당연히 많은 불편은 감수해야한다. 프리랜서지만 주 오일 도시로 출근하는 나의 남편은 왕복 네 시간을 길에서 보내며 전철로 다니고 있다. 그러나 한 달에 서너 권의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이 불편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한다. 지금 우리는 강바람이 실어오는 흙 내움을 맡으며 꽃나무를 기르는 재미에 푹 빠져 살고 있다.

   8년 전, 우리는 네팔로 여행을 떠났다. 동갑으로 함께 맞이한 회갑을 히말라야 산 위에서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이 여행을 준비하며 네팔을 검색하던 중, 여러 정보를 얻게되어 우리는 여행 일정을 변경하면서 그 참에 약간의 재능기부를 하게 되었다. 카트만두에 기독교단체가 세운 학교에서 교사가 부족하다하여 내가 자원하였다. 정규 교사자격은 없지만 영어와 음악 그리고 한국어를 가르칠 수는 있어서이다. 이곳에서 나는 삼개월간 음악을 가르쳤다. 피아노는 국제학교에만 한 대 있을 뿐 네팔 현지인들은 듣도 보도 못했다. 학교 교육에 음악이라는 과목이 아예 없다. 나는 아코디언을 어께에 메고 비행기를 탔다. 

   그곳에서의 삼 개월은 감동의 연속이었다. 첫 시간에 칠판에 오선지와 옥타브 음표를 그리고 도래미파를 가르치면 그 다음시간엔 <도도 솔솔 라라 솔>을 계명으로 내가 선창하면 아이들은 양철 지붕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러댄다. 그리곤 바로 모차르트의 작은 별 twinkle, twinkle, little star, 영어가사로 불려진다. 관광 가이드가 직업 선호도 일순위인 이곳 아이들은 영어를 곧잘 한다. 이어서 부른 스와니 강, 클레멘타인, 로렐라이 등은 완성도는 떨어졌지만 그래도 재능 있는 몇 아이들은 끝까지 영어 가사를 외우며 노래 부르기를 즐거워했다. 약속된 비자 만료기간이 다가왔다. 이제 떠날 때가 됐다고 그들에게 말했을 때 교실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아이들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 눈물로 그렁그렁해진 눈망울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떠날 무렵이 되어서야 남편과 합류하여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 올랐다. 그곳에서 우리는 세계 각국에서 온 트래커들과 닭백숙을 나누며 회갑 잔치를 했다. 가져간 아코디언은 카트만두 선교사 한 분께 드리고 가벼워진 몸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마음은 절대 가벼울 수 없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남편에게 언젠가는 이곳에 다시 오고 싶다고 했다. 그는 쉽게 그 ‘언젠가’에 동의했다. 

   그 때가 언제가 될지 그 당시로는 감을 잡을 수도 없었지만 나는 막연히 시간을 흘려버리지는 않았다. 다시 새로운 꿈에 도전하기로 했다. 60이 넘은 나이에 미래에 펼칠 꿈을 위해선 무엇보다도 건강이 기본이 된다. 97세까지 건강나이로 사시다 돌아가신 친정어머니의 DNA만 막연히 기대하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나는 그동안 띄엄띄엄 나가던 요가 강습에 적극적으로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삼년이 지나 요가 지도자 자격증을 따내었다. 롱런하기 위해 첫 번째로 갖춘 준비물이었다. 지구촌 어디에 가 있든지 건강 동아리를 만들어 지속적인 운동을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다음으로 마술사 자격을 땄다. 이 기술을 잊지 않기 위해 나는 최근 몇 해 동안 양평 군내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학습 지도자로 활동했다. 즐거워하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내게도 기쁨이 되고 노화를 늦추는 보약 역할도 되었다. 노후대책은 연금을 마련하고 재력을 확보하는 것만이 아니다. 거기에 걸맞은 소프트웨어가 준비되어 있어야한다. 이것이야 말로 은빛 꿈이 아닐까?

   인생 초기 1/3은 자기개발의 시간으로, 다음 1/3은 그 힘으로 창조하고 생산하는데, 마지막은 이웃에게 나누는 삶이 이상적이라 한다. Dream, Design, & Donate. 하라고 누군가 새로운 3D로 요약을 했다. 이제 나의 시간이 다가왔다. 10년 전의 그 ‘언젠가’를 구체적으로 실행할 때가 온 것이다. 이제는 삼 개월이 아니다. 우리는 카트만두 어린이 합창단을 창단하려고 한다. 이것이 우리 부부의 꿈이다. 그곳에 10년동안 살면서 올인하려고 한다. 매일 피아노 연습을 하는 날 보며, 남편은 요즘 은퇴를 고려하고 있다. 곧 70이 되는 우리는 그 ‘언젠가’를 더 미룰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음악적 환경에서 자라났다. 친정 형제들 몇은 전문가 이기도하고 내 딸도 음악을 전공했다. 유년시절에는 오랫동안 어린이 합창단에 다녔고. 이십대에는 미팔군 교회 소속 필그림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다. (조영남씨가 하얀 고무신 신고 팔군 교회에 다녔다는 얘기를 이곳에서 들었다.) 그리고 여러 곳에서 합창지도를 한 경험도 있다. 이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요즈음은 옛 은사를 찾아뵙고 시창과 청음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있다. 두 아이들도 각기 제 살길을 찾았다. 남은 걸림돌은 십여 년 간 가꾸어 온 이 정든 집을 정리하는 일이다. 시골 부동산은 매매되기가 쉽지 않다. 어찌하던지 2016년 내년에 우리는 또 다른 열매를 거두기 위해 단호히 가지치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네팔로 떠나려고 한다. 그리하여 꿈이 영글어 질 때 나는 그 합창단을 이끌고 한국에 와서 공연을 가질 것이다. 아마 그때쯤이면 나는 호호 할머니가 되어있을 것이다.